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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 (1999)Movie/Review 2024. 9. 15. 23:53
정지우 감독, 전도연, 최민식 주연의 [해피 엔드]를 봤다.
첫 장편을 연출하는 감독의 노출 많은 불륜녀 이야기. 25년 전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전도연 배우 입장에선 굉장히 위험한 도전이었다. 심지어 네 번째 영화 출연작인데 이런 과감한 결정을 하다니 참 대단하다. 그녀의 전성기 시절 작품을 볼 때마다 직업 정신에 감탄하게 된다.
세 주인공은 저마다 못난 구석이 참 많다. 취직은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맨날 서점에 가있는 남편, 실질적인 가장이지만 가정은 등한시하는 불륜녀, 그리고 그런 불륜녀에게 집착하고 선을 넘는 내연남까지. 그런데 그들이 밉지만은 않고 각자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남편이 저러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 '계속해서 자존감이 떨어지는 남편이 딱하다', '계속 여지를 줘서 애달픈 심정의 내연남이 좀 짠하다'. 연출, 각본, 연기 삼박자가 잘 갖춘 덕에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작품에서 반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라는 일범을 달래기 위해 반지를 끼기 시작한다. 말로는 이제 가정에 충실하자고 다짐하지만 반지는 여전히 빼지 않는다. 민기가 보라를 무참히 살해하고 손가락을 부러뜨려서야 겨우 빼낼 수 있었다. 근조등을 붙잡지 못한 보라의 손에는 여전히 반지가 끼워져 있다. 보라는 자의로 내연 관계를 끊을 마음이 없었던 것임을 의미하는 연출이지 않을까 싶다.
민기의 행동도 참 재밌다. 내연 관계를 알아채지만 계속 모른 척을 해준다. 딸을 위해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일까 아니면 가장 노릇을 못해 앞날이 걱정되는 비굴한 마음일까. 내연 관계를 알아챘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위층으로 도망갔다가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는지 확인하고, 집 문을 조심히 열었다가 닫는 모습은 정말 찌질하면서도 안쓰럽기 그지없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불행해졌다. 민기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보라,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게 된 일범. 민기의 삶은 행복할까? 직업이 없는 애 딸린 유부남의 미래는 결코 밝아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처럼 행복은 끝나버렸다. 민기가 그냥 참고 살았더라도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가장 죄가 없었던 민기가 주도적으로 결정했으니 최소로 새드한 엔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99분의 짧은 러닝타임에 압축해서 좋았다. 돌이켜 보니 장르 영화 바깥에서 최민식 배우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물론 살인을 하긴 하지만... 조만간 [파이란]도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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