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Review

바빌론 (Babylon, 2022)

Joonki 2023. 5. 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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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을 봤다.

 

바빌론은 기원전 18세기~기원전 4세기까지 약 1500년간 번영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로마보다도 앞선 최초의 국제 도시로 세계의 수도로 불리기도 했다. 대다수의 고대 도시가 그렇듯 시간에 따라 쇠락하고 결국 몰락했다. 현재는 서아시아 문명의 중심지로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무성 영화 시기에 신분 상승의 꿈을 이뤄냈지만 유성 영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저마다의 비극을 겪는다. 잭과 넬리는 정상의 자리에 물러나고, 자막 제작자인 페이는 직업을 잃고, 시드니는 작은 카페에서 연주한다. 등장인물 모두 가상의 인물이지만 당시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유성 영화 배우는 대사를 외워야 하고 목소리가 좋아야 하며 말로 연기할 줄 알아야 했다.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퇴장했다. 아니 당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도태된 이들의 비극을 다룬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 않다. 무성 영화 시대에 많은 이들이 도태되었지만 그 자리를 다른 이들이 채웠다. 현장 중심의 촬영 환경이 세트 중심으로 옮겨감에 따라 음향 전문가, 세트 제작자의 입지가 넓어졌다. 영화 산업 종사자는 계속 바뀌지만 영화 산업은 끊임없이 발전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극인가? 결말 시퀀스를 보면 남녀노소, 인종 구분 없이 다양한 관객들이 영화를 즐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오래 보면 희극인 셈이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과거에만 있었을까? 최근 30여 년 동안에도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디지털 필름이 대세가 되면서 촬영 인력이 많이 바뀌고, CG가 보편화되어 그래픽 전문가 채용이 대폭 늘었다. OTT가 TV와 영화의 경계를 허물면서 극장에 상영하지 않아도 영화제나 시상식에서 수상을 하는 작품도 많아졌다. 

 

반대로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고 과거의 인물을 찬양하기도 한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가 재개봉하면 보러 가기도 하고, 흑백 영화인 [시민 케인]은 여전히 영화학도들의 교과서 역할을 한다. 당시의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는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나 사람들을 좋아한다. 극 중 엘리노어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죽어도 당신이 나오는 영화를 재생시키는 순간, 당신은 그 안에서 몇 번이고 살아날 거예요. 50년 후에 태어날 아이들에게도 친구 같은 존재가 되겠죠."

 

데미언 셔젤 감독은 결말을 위해 영화를 만드나 싶을 정도로 후반 마지막 시퀀스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다. 그리고 항상 새드 엔딩도 해피 엔딩도 아닌 복합적인 결말로 마지막을 완성한다. [바빌론]도 그 공식을 철저히 지킨다. 할리우드를 바빌론에 비유하면서 영화 역사의 기쁨과 슬픔, 찬란함과 추악함을 공평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엔 감독의 영화를 향한 애정이 담겼다. 매니의 미소와 함께 말이다.

 

[퍼스트 맨]은 좀 아쉬웠지만 [바빌론]과 함께 돌아온 데미언 셔젤은 너무나도 반갑고 좋다. 흥행에 실패한 건 좀 슬프지만 앞으로도 작품 활동을 왕성히 해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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